요즘 뉴스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 기사 하나가 마음에 남는다. 판사와 검사가 법정에서 ‘맞짱’을 뜬다는 디즈니+ 예능 소식이었는데, 처음엔 그냥 흥미로운 콘텐츠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프로그램이 왜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우리 사회는 범죄와 처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에 늘 열광한다.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뉴스 시청률이 급증하고, 재판 중계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사람들은 정의가 실현되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어 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을 스릴처럼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이면에는 조용히 묻혀 버리는 목소리들이 있다. 법정에서 다뤄지지 못한 사연들,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법적 절차에 지쳐버린 이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외면해 온 진짜 정의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본 한겨레 기사에서는 집단수용시설 피해자들이 개별 소송 없이도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법적 절차의 벽 앞에서 좌절을 겪어 왔다고 한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자들은 과거 국가가 주도하거나 묵인한 시설에서 인권 침해를 당한 사람들로, 그 수는 수천 명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까지 법적 보상을 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개별 소송을 진행하려면 증거를 수집하고 법적 대리인을 선임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고령이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사실상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 피해자는 인터뷰에서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악몽을 꾼다. 법정에 서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우리 사회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하게 된다. 정의라는 단어는 무겁고 당위적이지만, 실제로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법이라는 것은 원래 냉정한 잣대여야 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고, 그래서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적어야 한다. 하지만 그 냉정함이 때로는 이미 지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벽으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나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 정신적 에너지를 요구한다. 변호사 비용은 시간당 수십만 원에 달하고, 소송 기간은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또 한 번 상처를 받기도 한다.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상세히 진술해야 하고, 상대방 측의 반박에 맞서야 하며, 때로는 변호사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법을 전공하지 않았고, 그 깊은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낀다. 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법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이 희생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예전에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정작 약자는 법을 쓸 줄 몰라.”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그 법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려면 그 법을 활용할 수 있는 ‘접근성’이 중요하다. 법적 절차가 복잡하고 전문적인 용어로 가득 차 있으면, 보통 사람들은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법률 용어는 마치 외국어처럼 느껴지고, 서류 작성은 암호 해독처럼 어렵다. 그래서 변호사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이고, 때로는 민사변호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변호사를 선임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변호사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변호사 1인당 연평균 수임료는 수천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중산층조차 부담스러운 금액이며, 경제적 약자에게는 더더욱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법적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법률 서비스의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오프라인에서의 대면 상담이 중요하고, 이는 접근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뉴스가 떠오른다. 연합뉴스에서 전한 내용인데, 판사와 검사가 출연하는 법률 예능이 공개된다는 소식이다. 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이 프로그램은 실제 법정 다툼을 재미있게 풀어내며 대중의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법이 대중문화 속에서 소비되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법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법정에서의 치열한 공방이 오락으로 포장되면서 실제 법적 분쟁의 무게감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된다. 실제 재판은 예능처럼 깔끔하게 끝나지 않고, 패배한 측의 고통은 오래 지속된다. 또한, 방송을 통해 특정 사건이 과도하게 조명되면 여론이 형성되고, 이는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흔들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법정 다툼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문화는 법에 대한 경외심을 낮추고, 정의를 단순한 승패의 문제로 축소시킬 수 있다.
최근에는 공인 명예훼손 소송에서 언론이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매일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2016년 이후 공인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의 승소율이 낮아졌다고 한다. 이는 공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생활이 과도하게 노출되는 상황을 방치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인도 한 인간으로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사회적 위치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건 분명 문제가 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은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위 사실이 유포되거나 악의적인 비방이 난무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명예훼손 소송의 승소율이 낮아진 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취지가 있겠지만, 그로 인해 공인들이 사생활 침해에 더 취약해진 측면도 있다. 이런 이슈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누구든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받아야 한다는 기본 원칙.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론재판이 빠르게 진행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여론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한번 낙인찍히면, 설사 법적으로 무죄를 입증하더라도 대중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기 어렵다.
나는 평소 국가폭력이나 학교폭력 관련 글을 주로 쓰지만, 이처럼 사회 전반의 법과 정의에 관한 이야기도 가끔 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결국 비슷한 지점을 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약자를 보호하고, 공정한 절차를 만들고, 정의가 실제로 실현되도록 하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없을까. 특히나 최근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인간적인 고통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학교 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지만, 정작 법적 절차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 오히려 2차 가해를 겪기도 한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진실 규명을 요구하지만, 법적 다툼은 끝이 없고, 그 사이에 피해자들은 또 다른 상처를 안게 된다.
사실 법이라는 시스템은 완벽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제도를 개선하고 보완해야 한다. 특별법 제정 운동도 그런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피해자들이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들이 좀 더 쉽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 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과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그 법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 모두의 삶은 조금 더 안전해진다.
오늘도 나는 법정 관련 뉴스를 보며 생각한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해결책으로 풀 수는 없을까 하고.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다만 우리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이야기한다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저항이 아닐까.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법과 정의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오늘도 한 걸음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본다.